사람이 먹을 음식은 함부로 재활용을 하면 반 인륜 범죄 행위가 됩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을 치면 생명에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료의 재활용을 몇 번이고 반복한 결과 생긴 광우병이라는 이상한 병도 결국 먹는 것의 재활용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컴퓨터 세상에서 반도체의 재활용은 의외로 사람들의 거부 반응을 사지 않습니다. 직접 목숨과 관련이 없기도 합니다만, 재활용이 생산 공장 차원에서 이뤄지니 사용자들이 그 재활용을 쉽게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값 싸고 좋은 물건이 나오면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고, 그 생각이 사실 그른 것도 아닙니다.(그렇다고 먹는 것을 이런 공장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겠죠. 그런 사람들도 의외로 많은 모양입니다만.)

중급형 시장에서 경쟁이 날로 뜨거워지는 그래픽 프로세서 시장에서는 작은 틈새 시장이라도 잡아내기 위해 다양한 제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불량(?) 반도체를 재활용하거나 종전 제품을 이름만 바꿔 내놓는 경우도 있는데, 엔비디아가 최근 발표한 지포스 9600GSO라는 제품이 그런 모델입니다. 하지만 이 그래픽 프로세서의 진정한 정체는 지포스 9 시리즈로 바뀐 세상에 맞게 이름과 얼굴만 바꾼 '영혼없는' 그래픽카드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살펴 볼까요?


■ 음식 재활용은 용서 못해도 반도체 재활용은 용서한다?!

사용자의 입맛이 점차 다양해지면서 그래픽 프로세서나 CPU같은 반도체 제품군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는 점은 웬만큼 컴퓨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장에 맞는 반도체를 전부 다른 생산 시설에서, 다른 기술로 만들어내는 것은 낭비입니다. 장치 산업인 반도체의 특성상 여러 생산 시설을 두는 것은 비용 부담을 늘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틈새 시장에 맞는 반도체는 어떻게 만들까요? 그 때 불량품(?) 반도체가 큰 일을 합니다. 불량품이라고 해도 아예 쓰지 못할 정도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규격 외라는 말이 더 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만들 때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의 성능이 나오지 않을 뿐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반도체를 모아 성능을 조금 제한해 신뢰성에 문제가 없도록 만들면 틈새 시장용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도체의 재활용이 흔한 CPU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텔이 코어2 듀오라는 CPU를 만들 때 E8400이라는 모델을 만드는 생산 시설과 E8200을 만드는 곳이 다르지 않습니다. 한 생산 라인에서 만든 반도체를 검사해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모델은 빠른 모델명을 붙이고, 그 속도를 내지 못하는 모델은 낮은 속도를 붙이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생산 방법입니다. 하지만 2차 캐시 메모리가 일부 문제가 있거나 코어 하나가 작동하지 않는 모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에는 이런 반도체는 폐기했습니다만, 이제는 그렇지 않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쓰지 못하도록 제한을 걸고 틈새 시장용 반도체 제품으로서 값싸게 팝니다. 코어2 듀오 E4000이나 E7000, 펜티엄 DC E2000 시리즈가 코어2의 생산 공정에서 나온 불량 반도체를 모아 만든 모델입니다. 이런 제품이 더 잘 나가 공급이 부족할 때는 멀쩡한 반도체도 기능 제한을 걸어 내보내긴 합니다만, 이런 틈새 제품을 만드는 원칙이 재활용이라는 점은 변함 없습니다.

이 규칙을 그래픽 프로세서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지포스 7600 생산 공장에서 나온 제품을 시험해 속도가 잘 나오는 모델에 7600GT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렇지 못한 모델에 7600GS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은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3D 처리 유닛에 조금 문제가 있는 제품에 그 부분을 쓰지 못하게 하여 지포스 7300GT라는 이름을 달고 내보내는 것은 반도체의 재활용이 됩니다.

반도체의 재활용은 반도체 업체 입장에서는 버려야 할 제품을 싸게나마 팔 수 있어 경제성을 한층 높일 수 있게 되며, 너무나 다양해진 사용자의 입맛을 맞출 수 있는 틈새 시장용 제품을 만드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소비자도 값 싸게 입맛에 맞는 반도체 제품을 살 수 있으니 결코 손해는 아닙니다. 더군다나 반도체 자체는 처음 생산 의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해도 이런 제한을 거치면서 문제가 없도록 바뀌었으니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 한 번 죽인 자식을 ‘왜’ 되살렸나



현재 엔비디아의 중고급 그래픽 프로세서는 지포스 9600GT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지포스 8800GT의 규격 외 반도체를 재활용해 만든 지포스 8800GS라는 제품을 잠시 이 시장에 내놓았고, 그 전에는 지포스 8600GT의 고속 모델인 지포스 8600GTS가 이 시장의 대표 주자였습니다. 하지만 AMD의 레이디언 HD 3850이 나오면서 두 제품은 엉덩이를 걷어 차이고 말았는데, 지포스 8600GTS는 성능 면에서 비교 대상이 아니었으며 지포스 8800GS는 가격 경쟁력에서 밀렸습니다.

지금의 지포스 9600GT는 사용자에게 매우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지금의 중급 그래픽 프로세서인 지포스 8600GT보다는 훨씬 나은 성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진 엔비디아가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입니다. 경쟁 상대인 AMD 레이디언 HD 3850은 기술은 종전 세대의 고급형인 레이디언 HD 2900 Pro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공정 기술을 발전시켜 가격은 낮추고 생산 능력은 한 차원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에 맞설 수 있는 성능, 가격, 생산 능력을 확보하려면 종전 그래픽 프로세서의 재활용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그 결과 지포스 9600GT는 지포스 8800/9800 시리즈와 전혀 다른 설계를 하게 됩니다.

설계가 달라지면 생산 라인이 달라지게 되어 하나의 생산 라인에서 두 가지 다른 그래픽 프로세서를 찍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됩니다. 완전히 다른 계열 제품인 지포스 9600GT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최적이지만 지포스 8800 시리즈의 규격 외 반도체를 처리해주던 역할은 하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지포스 8800/9800의 G92 코어의 규격 외 반도체는 쌓이게 되었습니다.

엔비디아가 지포스 9600GSO라는 낯선 이름으로 지포스 8800GS를 되살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원래 성능과 가격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던 지포스 8800GS를 대체하고자 지포스 9600GT를 만든 것이지만 그렇게 하고 나니 남는 재고 칩의 처리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고를 처리하고, 지포스 9600GT도 만족스럽게 공략하지 못하고 있는 레이디언 HD 3850과 싸울 수 있는 교체 선수(?)를 하나 더 들이는 차원에서 만든 것이 지포스 9600GSO인 셈입니다.

똑 같은 그래픽 프로세서를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이름만 바꿔 내놓는 것은 크건 적건 비난을 살 이유가 됩니다. 재고 제품을 이름만 바꿔 신제품인양 파는 ‘낚시질’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뿐더러, 잘 정리된 시장을 복잡하게 할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AMD가 과거에 레이디언 8500을 9100으로 이름을 바꿔 내놓았을 때에도 비슷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뭔가 제원을 높이거나 올린 부분이 있다면 사람들은 ‘알면서 속아주는’ 넓은 도량을 베풉니다.(레이디언 9600의 저속 모델을 레이디언 9550으로 파는 것에 대해 뭐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포스 9600GSO는 과거의 지포스 8800GS와 전혀 다를 것이 없고 엔비디아는 이 제품 출시를 강행했습니다. 욕을 먹는 것이 두렵지 않아서일까요?

사실 이 제품을 그대로 내놓아도 되는 명분은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지포스 8800GS라는 그래픽 프로세서는 엔비디아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포스 8800GS는 공식적으로는 일부 OEM 제조사에게 한정판으로 공급한 것이며, 이것을 일부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이 제품을 만들어 내놓았던 것이니 엔비디아는 책임이 없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알면서 모른 체 해야 하는’ 너무나 좋은 명분을 엔비디아는 갖고 있으니 이 제품이 지포스 8800GS와 같다고 해도 엔비디아를 욕할 수는 없습니다. 지포스 8800GS가 이름만 지포스 9600GSO로 이름만 바뀌었으니 이 그래픽 프로세서에 영혼이나 자존심은 있느냐 하는 질문도 해보고 싶습니다만, 어떤 식으로든 명분을 갖춘 이상 딴지를 걸 폭은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명분은 정치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 엔진만 강하다고 빠른 차가 되더냐… 지포스 9600GSO의 위치와 한계

그렇다면 지포스 9600GSO는 지포스 9600GT의 형님이 되는 것일까요, 아우가 되는 것일까요? 사실 정답은 나와 있습니다. 지포스 8800GS를 지포스 9600GT가 밀어낸 것도 성능 때문이었으며, 엔비디아의 제품 명명법에서는 GS가 GT보다는 낮은 모델이니 지포스 9600GSO가 하위 모델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적어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름과 과거의 경험만 갖고도 이 제품의 성능을 예상하고 서열까지 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보가 없는 사람은 새로 나온 그래픽 프로세서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제원표를 들여다봐도 좋은 부분이 있으면 나쁜 부분도 있으니 명확한 비교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조금 들은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트리밍 코어(스트리밍 프로세서)가 많으면 게임 성능이 좋다 하니 지포스 9600GSO가 더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dolf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이런 사람이 분명히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픽 프로세서의 성능을 따질 때 3D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유닛, 스트리밍 코어의 개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스트리밍 프로세서 개수만큼 무조건 3D 성능이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픽 프로세서의 작동 속도, 메모리와의 관계 등 성능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매우 많으니까요.



지포스 9600GT의 스트리밍 코어 개수는 9600GSO의 67% 수준입니다. 하지만 진짜 성능이 이 정도일까요? 그래픽 프로세서 자체만 계산해봐도 이 계산과는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엔비디아의 공식 웹 사이트에서 밝히고 있는 3D 데이터 처리 능력(Texture Fill Rate) 자료에 따르면 성능의 갭은 79% 수준으로 줄어듭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바로 그래픽 프로세서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포스 9600GT는 스트리밍 코어의 개수는 줄인 대신 코어의 자체 속도 및 내부의 쉐이더 처리 유닛의 속도를 지포스 9600GSO보다 훨씬 높였습니다. 그래서 코어 개수 * 속도의 단순 계산법으로도 지포스 9600GT의 3D 처리 능력이 9600GSO의 78%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기량이 큰 리무진이 그 보다 배기량이 작은 스포츠 쿠페보다 늘 빠른 것은 아니라는 점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만, 스트리밍 코어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지포스 9600GT는 코어 자체의 3D 처리 능력은 지포스 9600GSO(8800GS)와 비교해서 아무리 잘 쳐줘도 80% 정도의 점수만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점수(게임 성능)은 오히려 지포스 9600GSO보다 조금 앞섭니다. 바로 메모리 성능 때문입니다. 그래픽 프로세서의 데이터 처리량과 복잡함은 CPU 이상입니다. 데이터 입출력이 매우 잦은 만큼 메모리 속도와 한 번에 주고 받을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그래픽 프로세서의 성능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한 요인입니다.

지포스 9600GT는 지포스 8800GT와 같은 256비트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으며, 속도 역시 1,800MHz로서 지포스 9600GSO보다 빠릅니다. 이를 1초에 주고 받을 수 있는 데이터 양으로 환산해보면 이렇습니다.

1,800M * (256/8) = 57,600MB/초

이와 달리 지포스 9600GSO는 메모리 인터페이스를 192비트로 줄이고, 메모리 속도 역시 1,600MHz로서 상대적으로 뒤쳐집니다. 지포스 9600GSO의 초당 데이터 전송량은 이렇습니다.

1,600M * (192/8) = 38,400MB/초

그래픽 프로세서 자체의 능력만 따지면 지포스 9600GT는 9600GSO의 80% 수준이지만, 반대로 메모리 성능은 150% 수준으로서 오히려 훨씬 더 큰 차이를 내게 됩니다. 이런 여러 차이를 종합해보면 지포스 9600GT가 8800GS보다는 좋은 성능을 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지포스 9600GSO는 배기량(스트리밍 코어)은 크지만 미션의 변화가 느리며(느린 코어 속도) 무게도 많이 나가는(메모리 속도의 느림) 리무진 같은 느낌의 구성입니다. 반대로 지포스 9600GT는 배기량은 적지만 미션 등 동력 계통을 최적화하고 경량화에 성공해 잘 나가는 스포츠카인 셈입니다.

그래도 엔진의 힘은 무시할 수 없으니 지포스 9600GSO로도 소형차(지포스 8600GT), 경차(지포스 8500GT), 시티100(지포스 8400GS)보다는 빠른 것은 사실입니다. 지포스 9600GSO가 지포스 8800GS의 페이스 오프 모델임을 잊지만 않는다면, 지포스 8800GS 시절에 이미 알려진 장단점을 잘 이해한다면 지포스 9600GSO도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면만 보고 과대 평가하는 일만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과대 평가, 과소 평가는 결국 자기 주머니 사정을 나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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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keaton
    2008.05.14 12:52

    반도체의 수율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긴 하죠. 수퍼마켓에선 모서리 으깨진 두부 싸게 파는 것보다는 좀 양아치스러워 보이는 상술이지만 아예 아작난 웨이퍼로 장신구 만들어 파는 정도는 아니니 좋은 쪽으로 이해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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