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젯을 살펴보고 즐거워 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인간의 성향상 당연한 것입니다. 반대로 옛 명기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것은 잠시 쉬며 과거를 돌아보는 인간의 또 다른 성향입니다. 과거의 명기는 현재의 최신 가젯의 어머니이자 좋은 교사가 되는 만큼 이들을 살펴보는 것은 추억을 되돌아보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게임 마니아들 사이에 궁극의 게임 그래픽카드로 꼽혔지만 후속작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3dfx 부두5 5500'입니다. 이 그래픽카드는 아직 10년 만큼 역사가 길지도 않고,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기간도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 박힌 추억은 10년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여기서 적어 봅니다.


■ 아련한 추억의 이름, 부두

20세기 PC 게이머들에게 부두(Voodoo)의 이름은 결코 낯설지 않은, 정겹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이름일 것입니다. 부두 그래픽카드 또는 부두 3D 가속 카드를 꽂았다는 것은 게임 마니아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부두라는 이름은 21세기가 되기 전까지 최고의 게임 그래픽카드(가속기)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부두를 만든 3dfx사는 불꽃처럼 타올라 햐얀 재로 변해버린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부두는 아케이드 게임기용 3D 가속 칩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해 그 여세를 몰아 PC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그렇지만 부두는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그래픽카드'가 아닙니다. 순수한 '3D 가속기'일 뿐 그래픽카드를 따로 꽂아야 했습니다. 부두가 처음 나온 1996년 당시에는 그래픽카드 값도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었고, 부두 카드는 그 보다 더 비쌌으니 사용자들의 부담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래픽카드의 D-Sub 출력을 부두를 거쳐 보내는 '패스스루(Pass-Through)' 방식은 화질을 더욱 낮추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두는 당시 나왔던 ATI(지금의 AMD) Rage, 매트록스 Mystique/Millennium, S3(지금의 S3그래픽스/VIA) ViRGE와 비교가 되지 않는 높은 성능을 보여 주어 게이머들의 찬양(?)을 받았습니다. 부두 그래픽카드에 최적화한 전용 API, 글라이드(Glide)는 오픈GL, 다이렉트3D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글라이드 지원 게임을 실행할 때 뜨는 3dfx의 로고는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죠. 아직도 현역으로 뛸 수 있는 부두의 명작, 캐노푸스 Pure3D는 여전히 집에서 대기중입니다.

부두의 절정기는 1997년에 나온 2세대 부두, 부두2였습니다. 엔비디아 리바TNT와 마찬가지로 듀얼 텍스처 처리를 할 수 있었지만, 칩 하나가 아닌 텍스처 처리 칩을 아예 2개 달아 더욱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습니다. 경쟁사들은 '부두2는 800*600 픽셀 이상 해상도를 못낸대요', '부두2는 겨우 16비트 컬러만 처리할 수 있대요'하며 흠집내기를 했지만 사실 그들은 부두2를 두려워했습니다. 리바TNT도, ATI 레이지 프로도 부두2보다 훨씬 성능이 떨어졌으니까요. 더군다나 부두2 두 장을 꽂아 만드는 SLI 구성은 해상도 한계를 당시 게임의 최고 수준이었던 1,024*768 픽셀로 높이고, 성능은 더욱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나온 '그래픽카드' 부두 밴시는 텍스처 처리 유닛이 하나로 줄었지만, 그래도 부두의 기본이 어디 가겠습니까? 다만 2D 화질은 꽤나 '구린' 수준이긴 했습니다.

■ 부두의 라그나로크... 욕심이 과하면 망한다

너무나 빠르게 성장을 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부두2의 대박과 부두 밴시의 중박(?)으로 PC 3D 그래픽 세상의 중심이 된 3dfx는 스스로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미친 짓'을 해버리고 맙니다. 바로 그래픽카드 제조사였던 STB 시스템즈의 인수/합병, 그리고 차세대 모델인 부두3의 자체 생산입니다. 당시 매트록스와 ATI가 그래픽 칩을 OEM으로 공급하지 않고, 그래픽카드를 자체 생산해 커다란 이윤을 챙기고 있었던 만큼 3dfx도 그런 유혹에 빠질만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시장의 변화를 3dfx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부두는 3dfx 자체 생산으로 더욱 비싸졌습니다. 반대로 경쟁자인 엔비디아는 리바TNT2에서 부두3의 뒤를 쫓을 정도로 성능을 끌어 올렸습니다. 그러다 최초의 PC용 '그래픽 프로세서'인 지포스 256으로 부두3를 완벽하게 꺾어 버렸습니다. 32비트 그래픽에서 너무할 정도로 성능이 떨어지는 부두3를 그 때 까지 쳐다볼 정도로 소비자들은 3dfx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3dfx 라그나로크의 시작입니다.


시대에 뒤쳐진 덩치만 커다란 괴물, 보통 게이머라면 사랑할래야 할 수 없었겠죠.

성능에서 이제 다른 회사들을 압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 3dfx는 열심히 부두4와 부두5의 그래픽 프로세서가 될 'VSA-100' 칩을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때는 늦으리... 그 사이에 엔비디아는 지포스 2 시리즈를 내놓아 버렸고, 레이지 퓨리 맥스로 만신창이가 된 ATI조차 레이디언 시리즈를 발표했습니다. VSA-100 하나(부두4 4500)로는 그나마 성능이 떨어진다는 레이디언 LE보다도 못하고, VSA-100 두 개를 연결해 기판 하나에 SLI를 구성한 부두5 5500조차 지포스2 GTS를 이긴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딱 하나, VSA-100과 VSA-100 SLI가 보여주는 '기절할 정도의' 앤티 앨리어싱(AA) 기술은 지포스2 GTS로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 성능으로 VSA-100이 지포스2를 이긴 것은 그 뿐입니다. 기술이 되지 않아 AGP 2배속만 쓸 수 있고, 전기는 무식하게 먹어대 별도 4핀 전원까지 꽂아야 했던 부두 시리즈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었습니다. 3dfx는 결국 파산해버리고, 그 특허와 기술은 엔비디아가 헐값에 먹어 치웠습니다. 그 기술이 지금의 엔비디아 SLI(물론 그 때의 SLI와 지금의 SLI는 개념도 다르고 약자도 다릅니다.)를 비롯한 여러 기술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앞선 기술에 자만해 경쟁사의 기술 개발 움직임을 우습게 본 죄, 점차 저가형 그래픽카드 시장이 커지고 OEM 시장이 커지는 흐름을 읽지 못한 죄, 소비자들이 원하는 기술 개발을 가볍게 여기고 드라이버 지원 등 사후 지원을 사실상 포기한 죄는 3dfx가 망해도 할 말이 없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3dfx가 하얗게 불타 재만 남아버린 것은 전부 그들의 잘못입니다.

■ 성인 게임에서 본 AA 기술, 왜 그리 마음에 남던가?

제가 부두5 5500의 진정한 가치(?)를 느낀 것은 사실 황당한 계기였습니다. 첫 번째 직장을 뛰쳐 나와 당시 함께 항명(?)한 동료의 집에서 본 어떤 게임의 화면이 마음속에 박힌 것입니다.(참고로 그 화면을 보여줬던 그 분은 유명한 PC 부품 제조사 한국 지사의 중견 간부가 되었답니다.)

그 화면은 당시 조선일보(기억에는 맞을겁니다.)에서도 다룬 적이 있는 '미행2'라는 성인(18禁) 게임이었습니다. 사실 대형 신문이 왜 이런 보통 사람은 구할수도 없는 게임에 대해 개발사 웹 사이트 주소까지 적어가며 기사를 썼는지 이해는 가지 않습니다만(하라고 불을 붙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부두5 5500이 만들어내는 그 화면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기술력이 월등히 낮은 일본의 마이너 게임 개발사가 만든 3D 게임인 만큼 그 퀄리티는 사실 당시에도 좋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4배 AA를 적용한 그 화면은 계단현상같은 흠 잡을 것이 전혀 없는 매우 깔끔함을 자랑했습니다. 속도 또한 충분히 빨랐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3D 그래픽카드 전문도 아닌 '잡식성' 인간이었기에 부두5 5500의 두려움(?)을 몰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당시 '끝내주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중간 이상은 먹어주는' 레이디언으로는 꿈도 꿀 수 없던 그 화면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무리 흉측한 3D 그래픽을 가진 게임도 '뽀샤시'를 먹여주는 부두5 5500의 진가를 그 때 확실히 깨달았고, 그래픽카드를 레이디언 8500/9500으로도 바꿔도 결코 그 그래픽 퀄리티를 얻을 수 없었기에 결국 나중에 부두5 5500을 영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컨드 컴퓨터용입니다만.


그래도 지금 나온 그래픽카드와 비교하면 발열은 '양반'입니다.

지금 데스크탑 PC 4대를 돌리는 제게도 부두5 5500을 돌릴 수 있는 구형 PC는 없습니다. 이제는 드라이버 지원도 끊겨 베타 드라이버로 윈도우 XP를 겨우 돌리는 상황에서 아마 부두5 5500의 화면을 다시 보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때 그 화면은 앞으로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게임의 그래픽 퀄리티가 더욱 발전하더라도 말입니다.

조금 엉뚱한 계기에서 기억에 남는 클래식 제품이지만, 그렇기에 더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엉뚱한 곳에서 느낀 충격'은 저만 느끼는 것은 아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스마트가젯의 정신, 스네이크닥님?


추신: 6년 전에 큰 충격을 남긴 그 게임의 개발사는 여전히 멀쩡하며,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업계의 유일한 3D 게임 개발사입니다. 최신작은 무려 쉐이더 3.0의 'HDR 렌더링'까지 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메인스트림 3D 그래픽보다 훨씬 못하며, 지금 쓰는 지포스 7600GT에서 20fps도 나오지 못한다는 점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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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ㅂㅈㄷ
    2007.09.11 22:01 신고

    삼디에로게(...)를 만드는 회사는 환상(가명)사 말고도 차시간(가명)이라던가 앞날개(가명)등의 회사가 있긴 합니다.
    이번에 나올 시간 건너뛰기(가명) 벤치마크를 한번 굴려보시는건 어떠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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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olf
      2007.09.12 10:09 신고

      차시간은 환상사의 서브브랜드죠. 그러니 사실상 업계에서는 하나뿐이죠.^^

      다만 저쪽 업계에서 HDR 등 최신 3D 기술 적용은 아직은 시험 단계라고 봅니다. 오히려 HDR을 쓰지 않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그래서 문제의 게임은 너무 화면이 밝으면 HDR을 끄라고 합니다.)

      세상은 Shader 4.0 등 최신 기술로 가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모든 곳에서 3D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2D 영역이 오히려 감성적으로 더 나은 분야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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