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뉴스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인텔과 엔비디아 사이의 소송 이야기를 최신 뉴스로서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인텔이 네할렘 아키텍처 CPU에 맞는 칩셋을 엔비디아가 만들지 못하도록 미국 법원에 소송을 걸었고, 엔비디아에 이에 대해 반발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사건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컴퓨터의 공룡인 인텔은 반도체 공장 하나 없는 다윗 같은 엔비디아에 소송이라는 극단적인 ‘태클’을 걸었을까요? ‘제국 인텔’의 사악한(?)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엔비디아 마니아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송 뒤에는 엔비디아와 인텔의 애증의 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착한 다윗, 엔비디아를 나쁜 골리앗, 인텔이 괴롭히는 것이 아닌 서로 뭉치면서도 등 뒤를 칼로 찌르는 싸움을 벌여온 두 회사의 관계가 곪아 터진 것에 불과합니다. 도대체 두 회사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번 소송 사건은 인텔이 코어 i7같은 ‘네할렘(Nehalem)’ 아키텍처 CPU, 더 나아가 프로세서 안에 메모리 컨트롤러가 들어가는 인텔 CPU용 칩셋 개발 라이선스가 엔비디아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터졌습니다. 이에 대해 엔비디아는 2004년에 엔비디아와 인텔이 맺은 크로스 라이선스 및 칩셋 개발 라이선스에 따라서 칩셋 개발을 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실제로 인텔과 엔비디아는 2004년 11월에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바 있습니다. 인텔은 인텔 시스템 버스(FSB)와 인텔 CPU용 칩셋 개발 권리를 엔비디아에 넘겨 주게 되었습니다. 그 보도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엔비디아 2004년 인텔 CPU용 칩셋 라이선스 확보 보도자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FSB’라는 말입니다. FSB는 코어 아키텍처 또는 그 이전 세대 인텔 CPU가 쓰던 CPU와 칩셋(노스 브릿지, MCH)을 잇는 데이터 버스를 말합니다. 즉, FSB를 쓰는 CPU를 인텔이 내놓는 이상 엔비디아가 해당 인텔 CPU용 엔포스/지포스 시리즈 칩셋을 만들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네할렘 아키텍처 CPU는 더 이상 FSB를 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코어 i7은 더 이상 시스템 버스를 쓰지 않습니다. 코어 i7 900 시리즈는 QPI(QuickPath Interconnect)라는 새로운 버스 기술을 씁니다. 즉, FSB에 대한 라이선스만 갖는 엔비디아는 코어 i7 900 시리즈용 칩셋을 만들 수 없습니다. 현재의 코어 i7은 워크스테이션용 칩셋으로서, 엔비디아는 이 시장에 맞는 칩셋을 내놓을 계획은 지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SLI에 대한 라이선스를 인텔 X58 칩셋 메인보드 제조사에게 넘겨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이후에 나올 칩셋입니다. 코드명 린필드(Lynnfiled)로 불리는 코어2 쿼드의 후속 CPU는 일반 사용자용 모델이기에 시장 규모가 확실히 다릅니다. 엔비디아도 이 칩셋 시장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이 CPU에 맞는 칩셋 개발을 준비해 왔는데, 인텔이 라이선스를 내세워 칩셋 출시를 막은 것입니다. 린필드 CPU는 QPI 버스를 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FSB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린필드는 X58 칩셋 안에 들어 있던 PCI 익스프레스 컨트롤러를 CPU 안에 몰아 넣습니다. 사실상 칩셋의 노스 브릿지가 사라지는 만큼 PCI와 하드디스크, 기타 장치를 관리하는 하나의 칩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55 시리즈로 알려진 칩셋입니다.(칩셋은 원래 ‘칩들의 조합’인 만큼 원칩에서는 적절하지 않으나, FDD나 레거시 포트를 관리하는 수퍼 I/O도 있는 만큼 여전히 칩셋으로 부릅니다.) 린필드 CPU와 55 시리즈 칩셋은 칩셋 사이의 통신용으로 쓰던 DMI(Direct Media Interface)를 써 연결합니다. 인텔은 DMI에 대한 라이선스를 엔비디아에 넘겨주지 않은 만큼 이것을 근거로 소송을 건 것입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인텔의 소송을 ‘팽(烹)’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법 합니다. 실제로 엔비디아는 인텔이 엔비디아가 그래픽 프로세서를 내세워 자신들의 CPU 시장을 빼앗아간다며 엉뚱한 분야에서 트집을 잡는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엔비디아가 FSB에 대해서만 라이선스를 얻은 것이 사실이라면 QPI나 DMI 버스를 쓰는 CPU에 대해서는 칩셋을 만들 권리가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 되는 만큼 입장이 그리 유리하지는 못합니다.

인텔이 서드 파티 칩셋 제조사에 대해 소송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펜티엄 4가 갓 나왔을 때 인텔은 VIA테크놀러지에 칩셋 제조 금지 소송을 건 바 있습니다. VIA가 넷버스트 아키텍처 CPU용 칩셋 제조 라이선스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 소송은 결국 두 회사가 합의해 인텔이 VIA에 라이선스를 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승자는 사실상 인텔이었습니다. 당시 경쟁력이 없는 RDRAM 전용 칩셋, 인텔 850 이외에는 답이 없었던 인텔에게 SDRAM 또는 DDR SDRAM을 쓸 수 있던 VIA 칩셋은 너무나 큰 위험이었는데, 소송을 벌이며 VIA의 발목을 잡은 사이에 인텔 845라는 칩셋을 내놓아 VIA의 시장 점유율이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인텔의 소송 제기 그 자체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텔의 소송이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해도 과거의 사례와 인텔과 엔비디아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국에는 '복수극'이 그 본질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 2004년 라이선스 계약, 그들은 왜 손을 잡았나?

‘계약 위반’을 내세우는 인텔과 ‘적반하장’을 주장하는 엔비디아, 두 회사 모두 나름대로 사정은 있겠지만 소송까지 가야 할 정도로 사건이 커진 것은 두 회사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방의 시장에 칼과 포크를 들이 밀어온 ‘적과의 동침’ 관계가 두 회사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손을 잡은 관계이기에 작은 이해 관계의 충돌이 소송이라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입니다.

엔비디아와 인텔이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2004년 말의 상황을 되돌아 보면 이렇습니다. 당시 인텔은 PCI 익스프레스 기술을 처음 쓰기 시작한 인텔 915 칩셋을 내놓은 지 몇 달이 지난 상황이었으며, 엔비디아는 AMD CPU용 시장에서 1위 칩셋 제조사로서 승승장구하면서 엔포스 2 이후로 명맥이 끊긴 그래픽 코어 내장형 칩셋, 지포스 6100 출시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인텔은 무엇이 부족했기에 엔비디아의 손을 빌리려 했고, 엔비디아는 왜 그 전까지는 인텔 CPU용 칩셋 개발을 하지 못했을까요?

당시 인텔은 그래픽 코어가 들어간 G 시리즈 칩셋을 내세워 데스크탑과 노트북 PC를 합쳐 모든 그래픽 프로세서 제조사 가운데 ‘통계상의’ 1위 자리에 올라 있었습니다. 별도의 그래픽 프로세서를 만들지 않던 인텔이지만 칩셋의 내장 그래픽 코어만으로도 1위 자리에 오른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내장 그래픽 코어 칩셋이 없어 엔비디아의 손을 빌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텔은 당시 인텔 CPU 사용자들이 갖던 ‘게임이 그런대로 돌아가는 값싼 내장 그래픽 코어 메인보드’라는 틈새 시장을 채우고자 엔비디아와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 전까지 인텔은 엔비디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넷버스트 아키텍처 CPU용 칩셋 개발 라이선스를 주지 않았습니다. 인텔과 엔비디아는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 ‘찰떡궁합’ 소리를 들어가며 어느 정도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정작 칩셋 사업만큼은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갔습니다. 그 전에는 인텔은 엔비디아의 칩셋 설계 능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은 반면 AMD CPU 시장을 빠르게 휩쓸어 버린 엔비디아의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칩셋 품질로서 인텔 CPU의 신뢰성 신화에 먹칠을 할 가능성도, 엔비디아가 AMD CPU 시장에서 VIA와 SiS를 몰아낸 것처럼 인텔을 칩셋 시장에서 밀어낼 가능성도 경계한 것입니다.

인텔도 자신들의 내장 그래픽 코어가 게임과 멀티미디어 성능이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틈새 시장용 칩셋 개발을 위해 전략적으로 ATI를 지원해 왔습니다. ATI도 AMD CPU용 칩셋을 만들기는 했지만, AMD보다는 인텔 CPU용 칩셋을 더 많이 내놓았으며 그래픽 프로세서 제조사답게 어느 정도의 그래픽 성능을 갖춘 모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인텔 입장에서는 ‘큰 욕심을 갖지 않는 틈새 시장용 칩셋으로 만족하는 ATI’가 ‘큰 야망을 품고 있는 엔비디아’보다는 아무래도 다루기가 쉬웠습니다.

그렇지만 엔비디아에 라이선스를 주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인텔의 시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의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습니다.

- 엔비디아 칩셋의 신뢰성 확보: 엔포스 2 이전 시기까지만 해도 엔비디아 칩셋은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드디스크 데이터의 손상을 일으키는 데이터 오염 문제부터 메모리 관리 능력의 문제까지 그 문제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엔포스 3부터는 그런 문제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엔포스 4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인텔이 엔비디아의 칩셋 설계 능력이 CPU의 신뢰성을 크게 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 칩셋 시장 수성에 대한 자신감: 인텔은 엔비디아가 넷버스트 아키텍처 CPU 라이선스를 얻어 칩셋을 만들게 되면 지금까지 쌓아온 인텔 칩셋의 시장 점유율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해 왔습니다. ‘일부러 내준 것’이나 다름 없는 VIA, SiS, ATI 같은 서드 파티 칩셋 제조사의 점유율을 넘어 인텔 칩셋의 디딤돌까지 빼앗으려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라이선스를 막아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인텔은 자신들의 칩셋이 성능과 가격 면에서 엔비디아 칩셋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엔비디아 칩셋이 결코 저렴하지 않을 것이며, 조금 가격이 비싸더라도 사람들이 성능 때문에 인텔 칩셋을 찾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지 않았다면 라이선스를 쉽게 내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커다란 바다인 인텔 CPU 시장에 군침을 흘리던 엔비디아와 굳이 엔비디아 칩셋을 막아야 할 이유가 사라진 인텔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 2004년 11월의 크로스 라이선스인 셈입니다. 하지만 인텔은 이 때 최소한의 ‘안전핀’을 마련해 놓았는데, 바로 라이선스 대상이 FSB 뿐임을 못박은 것과 DMI 버스 라이선스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DMI 버스는 그 누구에게도 라이선스를 주지 않았는데, 그래서 서드 파티 칩셋 제조사들은 V-Link나 하이퍼트랜스포트, MUTIOL같은 버스 기술을 써야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엔비디아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한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 밥그릇을 뺏는 진흙탕 싸움 - 협력하면 이상적인 자들의 전쟁

인텔 입장에서는 엔비디아 칩셋의 잠재력이 ‘찻잔 속의 폭풍’ 이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엔비디아에 칩셋 라이선스를 준 것이며, 실제로 엔비디아 칩셋은 인텔 CPU 시장에서 예상 외의 낮은 시장 점유율을 보였습니다. 그나마 ‘밀어내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가격을 정한 지포스 7050 칩셋 정도만 어느 정도 판매가 이뤄졌을 뿐 나머지 칩셋은 일부 마니아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았습니다. 시장 자체는 인텔 생각대로 이뤄졌는데 왜 지금에 와서 인텔은 엔비디아에게 커다란 ‘태클’을 건 것일까요? 문제는 칩셋이 아닌 다른 데 있는데, 엔비디아가 인텔의 밥그릇을 노리는 일을 적지 않게 벌였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텔 역시 엔비디아의 밥그릇을 탐냈으니 서로 관계에 흠집을 내온 셈입니다.

인텔의 주요 사업은 데스크탑/서버/노트북 PC 및 PDA/네트워크/산업용 등 임베디드 기기용 CPU 사업, 칩셋 사업, 네트워크 장치 사업, 플래시메모리 및 저장장치(SSD) 사업이 핵심입니다. 엔비디아는 원래 데스크탑/노트북 PC 및 워크스테이션용 그래픽 프로세서 사업을 중심으로 임베디드 그래픽과 칩셋 사업을 벌여 왔습니다. 이대로만 하면 두 회사의 밥그릇은 서로 겹칠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살아 남으려면 꾸준히 다른 사업을 벌여야 하는 법. 새로운 사업에서 두 회사는 서로의 밥그릇을 너무나 깊게 침범하고 말았습니다.


엔비디아 Tesla는 GPGPU의 활용 가능성을 활짝 열었지만 인텔에게는 재앙과 같았습니다


엔비디아는 쿼드로 그래픽카드의 높은 실수 연산 능력을 일반 컴퓨터에 쓸 방법을 찾아 왔습니다. 그것이 GPGPU(General-Purpose GPU, 범용 그래픽 프로세서) 분야입니다. GPGPU는 만능이 아니기에 운영체제 부팅과 프로그램 실행 자체에 필요한 범용 CPU를 필요로 합니다만, 강력한 연산 기능이 필요한 수학/과학용 워크스테이션과 렌더러, 수퍼 컴퓨터에서는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엔비디아는 그래픽 작업용 쉐이더 언어인 Cg를 2002년에 내놓으며 GPGPU에 대한 준비를 해왔으며 CUDA라는 GPGPU용 언어와 테슬라(Tesla) 수퍼컴퓨터 형태로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엔비디아가 GPGPU를 강화할수록 이 시장에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던 인텔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텔은 이러한 수퍼컴퓨터 시장에서 인텔 제온 MP와 아이태니엄 CPU를 내놓으며 꾸준히 투자를 해왔습니다. 여기에 엉뚱한(?) 그래픽 프로세서 제조사가 젓가락을 들이미는 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엔비디아는 GPGPU를 넘어 일반 CPU 시장에도 꾸준히 군침을 흘려 왔습니다. 인텔이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휴대전화/PDA용 CPU 시장에 ‘테그라(Tegra)’라는 통합형 임베디드 CPU를 내놓았으며, 아예 범용 CPU 개발을 위해 VIA의 CPU 사업부 인수를 제안하고 트랜스메타사의 CPU 기술을 라이선스하기까지 했습니다. GPGPU는 ‘그래픽카드 기술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핵심 분야인 CPU까지 엔비디아가 넘보는 것에 대해 인텔은 불쾌함을 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대로 엔비디아를 내버려 두면 인텔 CPU용 틈새 시장 칩셋이라는 길을 열어주자 CPU 시장까지 잡아 먹히는 가도멸괵(假道滅虢)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인텔은 품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텔 역시 엔비디아의 밥그릇을 노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엔비디아가 미래의 주력 사업으로 생각하던 GPGPU 시장이 그것인데, 인텔은 코드명 ‘라라비(Larabee)’로 불리는 GPGPU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엔비디아처럼 전용 그래픽 프로세서 사업을 하지 않는 인텔은 CPU 개발 기술을 활용하여 라라비를 만들고 있습니다. 인텔은 라라비를 일반 가정용 그래픽 프로세서로서 쓸 계획은 아직 없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을 하지는 못하는 만큼 그렇게 된다면 인텔은 엔비디아의 ‘철밥통’을 직접 노리는 셈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 국내외에서 벌어진 인텔과 엔비디아의 PC 플랫폼 싸움도 두 회사의 감정의 골을 깊게 했습니다. 2008년 여름에 엔비디아가 벌인 ‘최적화 PC 켐페인’은 CPU를 낮추고 그래픽카드에 투자하는 것이 PC 성능을 좋게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때 타깃을 인텔로 삼았습니다. 내장 그래픽 코어를 쓰는 고성능 인텔 CPU PC를 사지 말고 그 돈으로 엔비디아 지포스 시리즈 그래픽카드를 사라는 내용은 일부러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텔의 사업을 방해하는 것으로 비쳐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인텔은 ‘그린 PC’라는 이름의 PC 플랫폼을 국내에 발표했는데, 내용은 정 반대로 ‘전기 먹는 하마인 그래픽카드만 높이지 말고 내장 그래픽 코어 성능이 좋은 G45 칩셋 메인보드와 고성능 인텔 CPU를 사라’는 것입니다. 이 역시 사실상 전력 소비량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엔비디아를 겨냥한 내용이었기에 두 회사는 신경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내용은 스마트개짓에서도 한 번 다룬 바 있는데, 사실 두 회사의 싸움에 가장 이득을 본 회사는 다름아닌 AMD였습니다.^^

★ 인텔과 엔비디아의 최적화 PC 논란 보기


엔비디아 Ion 플랫폼. 인텔 넷탑 플랫폼의 약점을 정확히 짚은 것이 독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최근 나온 엔비디아의 아이온(Ion) 플랫폼은 인텔의 새로운 텃밭인 ‘넷탑/넷북’을 크게 위협했습니다. 인텔 아톰 CPU에 지포스 9400 칩셋을 더한 아이온 플랫폼은 지금의 인텔 아톰 플랫폼이 갖는 내장 그래픽 코어의 성능 한계를 노렸습니다. 아톰 역시 FSB 기술을 쓰는 만큼 인텔이 아이온 플랫폼 칩셋 개발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만, 자칫 잘못하면 인텔이 일궈낸 시장을 엔비디아에 그대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인텔을 감쌌습니다.

결국 인텔의 이번 소송은 엔비디아에게 ‘우리 밥그릇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의 성격이 강합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괜한 딴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입니다만, 인텔이 그런 ‘막가파식’ 경고장을 보낼 정도로 인텔의 시장을 마구잡이(?)로 위협했다는 점이 두 회사의 사이를 갈라 놓은 이상 그들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인텔 역시 '정당방위' 차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엔비디아가 인텔의 주요 시장을 먼저 건드린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해도 막강한 힘을 지닌 인텔의 반격은 '궤멸작전' 수준에 가깝습니다. 라라비 프로젝트는 엔비디아가 사운을 걸고 추진하는 GPGPU 시장을 쓸어버릴 위협적인 존재이며(비록 그 성능에 물음표가 붙었다고 해도), 차세대 CPU 코어 안에 그래픽 코어를 넣고자 하는 계획 역시 엔비디아의 칩셋 및 그래픽 프로세서 사업을 크게 위협합니다. CPU 코어 안에 어느 정도 성능을 갖춘 그래픽 프로세서를 넣는다면 지금보다 더 그래픽카드를 사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 것은 분명하며, AMD도 그러한 방향을 생각하는 이상 엔비디아의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게 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비즈니스입니다만 인텔이 걷는 방향 역시 엔비디아의 생존을 크게 위협하는 점은 사실입니다.

◆ 갈데까지 간 두 회사, 누가 더 손해를 볼까?

소송으로까지 번진 인텔과 엔비디아의 감정 싸움은 어떤 결론이 날까요? 과거 VIA처럼 두 회사가 합의를 하는 결말도 있겠지만 현재의 엔비디아의 미래 전략은 안개에 쌓여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 소송은 어떤 결과로서 끝나더라도 엔비디아의 손해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지포스 8 시리즈 이후 엔비디아의 신제품은 ‘전력 소비량이 많고 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못한 값비싼 물건’이라는 평가를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AMD(구 ATI) 그래픽 프로세서와의 성능 차이가 커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습니다만, AMD가 레이디언 HD 3000/4000 시리즈를 내놓으며 시장 분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당분간 별도의 그래픽 프로세서 시장에서 엔비디아가 2위로서 밀리는 일은 없겠지만, 이러한 시장 정체 상황이 이어지면 미래는 알 수 없게 됩니다. 여기에 인텔이 라라비 기술을 활용한 그래픽 프로세서를 내놓고 그것을 파는 데 열을 올린다면 엔비디아의 시장 점유율에 빨간불이 켜질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별도의 그래픽 프로세서 시장보다 훨씬 큰 내장형 그래픽 코어 메인보드 시장에서 엔비디아는 주변인으로 밀려버린 상황입니다. 인텔 시장에서는 생각만큼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인텔이 G45 칩셋을 내놓으면서 이제 지포스 시리즈 칩셋의 메리트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입니다. AMD CPU용 칩셋 역시 AMD가 ATI를 합병하며 얻은 기술로서 직접 칩셋을 만들게 되면서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보이던 엔포스 제국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엔비디아의 칩셋 분야는 인텔과의 소송을 떠나서 지금 위기 상황입니다.

GPGPU같은 개인용 수퍼컴퓨터 시장에서는 아직 인텔과 엔비디아 모두 확실한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이 시장이 아직 규모가 작고 초기 단계이기에 앞으로 두 회사가 내놓을 제품에 따라서는 순위가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인텔 라라비는 곧 위험으로서 닥쳐올 것이며, 아직은 작은 위협에 불과한 AMD 파이어스트림 역시 AMD가 보급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이상 다크호스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CPU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자니 이 역시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인텔과 AMD는 검증된 강력한 CPU 기술을 갖고 있어 데스크탑 PC부터 서버까지 범용 CPU 전체 분야를 만족하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검증된 x86 프로세서 기술이 없으며, CPU 성능이 낮은 트랜스메타 기술만 지닌 엔비디아는 CPU 시장에 뛰어들더라도 초 저가형 PC처럼 한정된 시장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VIA의 CPU 사업을 인수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엔비디아는 GPGPU 또는 그리드 컴퓨팅이 세상의 대세가 되며 범용 CPU 성능은 크게 낮아질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것이 사실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그래픽 프로세서 기술까지 갖고 있거나 갖게 될 인텔과 AMD가 그래픽 프로세서와 고성능 범용 CPU 기술을 묶은 ‘헤테로지니어스’ 코어 CPU 개발로서 CPU 시장의 주도권을 잡아 버리면 엔비디아는 역시 주변인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엔비디아가 ‘지포스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커크를 최고 과학자 자리에서 밀어내 2선으로 후퇴시키고 GPGPU 전문가를 이 자리에 앉힌 것도 뭔가 획기적인 변화를 주지 않으면 ‘그래픽 프로세서만의 강자’ 엔비디아는 언젠가 주저 앉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원인일 것입니다. 엔비디아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시대 상황에 살 길을 찾으려 나선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그 새로운 사업이 하필 ‘뭉치면 이상적인 파트너’인 인텔인 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CPU와 그래픽 프로세서를 모두 거머쥔 AMD와의 싸움에서 이기고자 두 손을 굳게 잡기도 한 두 회사는 이제 점차 무한 경쟁의 길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두 회사가 회사의 운명을 걸고 승부를 벌인다면 누가 살아 남을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능성이 높은 결과는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돈 많고 가격/마케팅 싸움에서 이긴 자가 살아 남는다’

두 회사의 진흙탕 싸움을 바라보는 AMD는 기분이 어떨까요? 둘 다 상처를 입고 헐떡일 것을 기대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둘 가운데 응원을 한다면 ‘성격 나쁜(?) 신흥 적’ 대신 ‘오래된 라이벌’을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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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20 18:34 신고

    올블로그에서 우연히 들렸습니다.
    제가 하드웨어 소식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게 몇 년밖에 안 되어서 인텔-엔비디아 이야기는 서로 자기네 CPU/GPU를 업그레이드 하는 게 좋다고 난리친 것 이외의 옛날 이야기는 잘 몰랐는데 덕분에 알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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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2.20 21:40 신고

    어디나 살아남으려는 전략이 강하군요. 엔비디아가 이겼으면 합니다. 어느 한 기업이 독점을 하면 시장이 기능을 잃으니까요.

    추신 : 질문이 있는데요 센트리노 는 어떤 기준으로 노트북에 붙이는 겁니까? 사양은 다 똑같은데 어떤 노트북은 센트리노라 가격이 좀더 비싸고 다른 노트북은 센트리노가 아니라 가격이 좀 낮아서요. 결국 가격 낮은 걸 사긴 했는데 뭔가 찝찝해서 물어봅니다... 대답해 주시면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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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21 10:21 신고

      센트리노의 기준은 매우 단순합니다.

      인텔 CPU + 인텔 칩셋 메인보드 + 인텔 무선 LAN 카드

      이 조건만 충족하면 됩니다. 물론 마구잡이로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은 있는데, 셀러론 시리즈는 센트리노를 받지 못합니다.

      AMD 푸마는 이 보다는 더 느슨합니다.

      AMD 튜리온 X2(울트라) + AMD M780 칩셋 메인보드 + 인증받은 무선 LAN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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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02.24 00:30 신고

    아무래도 인텔이 이기면 독점체제가 되어 버리겠죠...

    그렇게 되어 인텔이 무지막지하게 커진다면 AMD도 이기지 못하는 상대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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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24 09:50 신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CPU 시장은 인텔의 독점 직전 상황입니다. 엔비디아가 사라진다고 이 시장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x86 워크스테이션 및 서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프로페셔널 GPU와 GPGPU입니다. 프로페셔널 GPU의 경우 현재의 쿼드로도 어디까지나 1천만원대 이하의 워크스테이션이 주요 시장인 만큼 1억원대 수준의 머신 시장을 인텔이 손을 대기는 어렵습니다. GPGPU의 경우 OpenCL 등 표준 규격이 나오는 만큼 최악의 경우 엔비디아가 공중분해가 된다고 해도 바로 독점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습니다.

      AMD는 적어도 '몇 년 안에' 인텔을 꺾겠다는 황당한 야망을 품고 있는 곳은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도 인텔은 전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입니다. 더 커진다고 해도 커질 것은 한계가 있으며, 적어도 10년 안에 AMD가 인텔을 전 분야에서 꺾는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다만 그 이후에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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