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D가 만든 첫 번째 데스크탑 PC용 쿼드코어 프로세서, 페놈(Phenom)이 드디어 우리나라 시장에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몇 가지 사정에 의해 저도 이 넘의 CPU의 주인이 되었습니다.(펜티엄 D 805도 그렇고, 페놈도 그렇고 제가 이 제품 판매 1호가 되고 말았습니다. T_T)

이 CPU를 산게 지난 주 화요일입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아직 페놈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욕을 많이 먹어서 꽂길 망설이는 것은 아닙니다.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XYZ’한 상황 때문입니다. 이 ‘어안이 벙글벙글’한 이유를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이 사연을 말하기 전에 페놈의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 좀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특징을 어느 정도 알아야 뒤의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페놈은 종전 애슬론 64 X2에서 쓰던 K8 아키텍처가 아닌 K10 아키텍처를 쓰고 있습니다. 사실 K10 아키텍처는 ‘진정한 K10’은 아닌데, 원래 AMD가 계획하던 10세대 프로세서 아키텍처인 초기 K10은 포기했고, 일명 ‘K8L’로 불리던 K8의 마이너 업그레이드 아키텍처를 K10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K10 아키텍처는 K8의 특징을 거의 대부분 이어 받습니다. 대신 K8의 한계 몇 가지를 수정하고 업그레이드하는 마이너 업그레이드를 거쳤습니다. 수퍼스케일러/벡터 프로세싱 성능을 높여 멀티미디어 처리 능력을 올리고, K8이 코어에 비해 크게 밀린 멀티 스레드 처리 능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밖에 코어 아키텍처에 비해 뒤쳐진 전력 관리 기술도 강화했습니다.

덤으로 K8의 장점이던 내장 메모리 컨트롤러를 하나에서 두 개로 늘려 병목현상을 줄이고, 하이퍼트랜스포트 3.0 버스 기술을 적용했습니다. 종전 K8 아키텍처가 쓰던 하이퍼트랜스포트 2.0 규격은 버스 속도를 1,400MHz(듀얼펌프 2,800MHz) 이상 높일 수 없는데, 그래서 애슬론 64 X2는 1,000MHz(듀얼펌프 2,000MHz), 32비트 버스를 써 최대 8GB/초의 데이터 전송 속도가 한계였습니다. 페놈이 쓰는 HT 3.0은 최대 2,600MHz까지 속도를 높였으며, 페놈 자체는 1,800MHz(듀얼펌프 3,600MHz), 32비트 버스 기술로서 14.4GB/초까지 대역폭을 늘렸습니다.

(여기서 ‘AMD는 내장 메모리 컨트롤러 집어 버리고 CPU 코어나 잘 만들어라’라는 소리를 하는 일부 P모 커뮤니티 및 D모 가격비교 사이트 마니아들에게 사실 하나를 밝힙니다. 인텔조차 차세대 아키텍처인 ‘네할렘(Nehalem)’에서 CPU 내장 메모리 컨트롤러를 쓸 계획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CPU 코어와 메모리 컨트롤러의 통합은 x86 세상에서 대세이지, AMD가 엽기적인 짓을 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능을 올리기 위한 필연적인 발전을 당시 ‘삽질’에 바쁘던 인텔보다 AMD가 먼저 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메모리 컨트롤러와 하이퍼트랜스포트 버스 기술이 바뀌면서 소켓 규격이 바뀔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해서 태어난 규격이 소켓 AM2+입니다. 소켓 AM2+는 종전 규격과 같은 940핀을 쓰며, 물리적인 핀 배열도 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소켓 AM2+와 소켓 AM2는 상호 호환성을 갖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소켓 AM2용 애슬론 64 X2를 새로운 메인보드에 꽂아도 잘 작동하며, 페놈을 비롯한 소켓 AM2+ CPU를 종전 메인보드에 꽂아도 잘 작동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듀얼 메모리 컨트롤러와 하이퍼트랜스포트 3.0 기술은 쓰지 못하게 되지만, 적어도 작동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AMD는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이론이 저렇다고 현실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죠. 페놈 프로세서가 전 세계에 풀린지 이제 두 주가 지나고 있지만, AMD가 이론적으로 약속한 소켓 AM2와 AM2+의 상호 호환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소켓 AM2+ 메인보드에서 소켓 AM2 CPU를 꽂는 것은 그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그 반대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소켓 AM2+용 칩셋은 현재 AMD 790X/790FX 뿐이며, 이들 메인보드는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신뢰성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만큼 사용자들이 당분간 꺼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만큼 신뢰성을 검증받은 엔포스 560/570, 지포스 7025/7050 및 AMD 690 시리즈에 페놈을 꽂아 쓰고 싶어하는 사용자들이 더 많습니다. 메인보드 값도 브랜드 제품도 7만원대에 살 수 있으니 경제성도 충분합니다. CPU 가격은 인텔의 쿼드코어 CPU보다 그리 저렴하지 않지만, 메인보드에서 2~3만원은 가볍게 아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이 글을 쓰고 있는 2007년 11월 26일 현재 각 메인보드 제조사의 소켓 AM2 모델 페놈 프로세서 지원 상황은 이렇습니다.
아수스: 전멸
기가바이트: GA-M57SLI 시리즈만 지원
ECS: 전멸
MSI: 13개 모델 지원
아비트: 전멸
폭스콘: 전멸
바이오스타(디앤디컴/유니텍 등): 전멸
애즈락: 전모델 지원
제트웨이(유니텍): 전멸
팰릿(이엠텍, 유니텍 등): 전멸
일명 ‘연구소’라 불리며 엽기적인 지원을 가장 먼저 하는 애즈락은 그렇다 쳐도 인지도와 사용자가 많은 아수스, 기가바이트, 바이오스타의 지원 상황은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보통은 반응이 꽤 늦는 MSI가 이번에는 빠르게 BIOS를 내놓긴 했습니다만, 많은 사용자들이 찾는 브랜드 제품은 거의 대부분 아직 페놈을 꽂아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쓰는 기가바이트 GA-MA69G-S3H 또한 아직 BIOS가 없어 한 주째 제 능력을 1초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BIOS 업데이트가 늦는 것일 뿐인 것을 뭘 그리 호들갑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술적으로 지원에 전혀 문제가 없는 제품의 BIOS 업데이트가 제품이 시장에 나올 때까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시장에 나오지도 않은 인텔의 차세대 모델, 코어2 듀오 E8000, 코어2 쿼드 Q9000 시리즈는 이미 몇 달 전에 지원을 선언한 업체가 있을 정도로 빠른 반응을 보인 것과 비교하면 AMD의 메인보드 제조사에 대한 기술 지원 노력이 부족함을 의미합니다. 충분히 기술적으로 호환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메인보드 제조사들이 BIOS 하나 내놓도록 재촉하지 못한 AMD는 지금까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나라 P모 커뮤니티 사용자들의 지나친 악평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페놈 프로세서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성능도 예상 이하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수나마 남아 있는 업그레이드/신규 사용자 수요조차 끌어오지 못하는 지금의 AMD 상황은 나쁘게 말하면 ‘바보 기업’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좋다고 자랑해도 그것을 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AMD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질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악재가 많은 AMD에게 페놈의 실패는 꽤 큰 부담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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